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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운명 (절판본) [중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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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문재인의 운명 (절판본) [중고도서]
판매가 24,000원
저자/출판사 문재인 /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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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468
발행일 2011-09-14
상품간략설명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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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문재인의 운명』은 ‘노무현재단’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를 비롯한 30년 동행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가 처음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함께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서거 이후 지금까지의 30여년 세월 동안의 인연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만남’ ‘인생’ ‘동행’ ‘운명’ 총 4장으로 나누어 정치적 파트너로서 뿐만 아니라 친구이자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양장특별판 한정판매]



저자소개

저자 문재인은 1952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 197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 졸업. 1980년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1982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모임 대표.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과 부산 NCC 인권위원, 부산 YMCA 이사,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년 부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1995년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2003년, 2005년 청와대 민정수석. 2004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 현재 <노무현재단> 이사장



목차

강물이 되어 다시 만나기를 

제 1부 만남 
1. 그 날 아침 
2. 첫 만남 
3. 동업자 
4. 선배처럼 친구처럼 
5. 인권변호사의 길로 
6. 동지 
7. 열정과 원칙 
8. 87년 6월, 항쟁을 하다 
9. 노동자 대투쟁과 노 변호사의 구속 
10. 노 변호사를 국회로 보내다 
11. 혼자 남다 
12. 동의대 사건과 용산참사 
13. 조작간첩 사건 
14. 지역주의와의 싸움 
15. 2002년의 감격 

제 2부 인생 
1. 아버지와 어머니 
2. 가난 
3. 문제아 
4. 대학, 그리고 저항 
5. 구속, 그리고 어머니 
6. 아내와의 만남 
7. 구치소 수감생활 
8. 강제징집 
9. 공수부대 
10. 고시공부 
11. 다시 구속되다 
12. 유치장에서 맞은 사시합격 
13. 변호사의 길로 

제 3부 동행 
1. 청와대로 동행 
2. 참여정부 조각(組閣) 뒷얘기 
3. 서울 생활, 청와대 생활 
4. 대북송금 특검 
5. 검찰 개혁 
6. 국정원 개혁 
7. 권력기관의 개혁 
8. 사회적 갈등관리 
9. 노동사건 
10. 미국을 대하는 자세 
11. 고통스러운 결정, 파병 
12. 아픔 
13. 대통령, 재신임을 묻다 
14. 자유인 
15. 히말라야 
16. 카트만두에서 접한 탄핵 
17. 탄핵대리인 
18. 시민사회수석 
19. 대연정, 대통령의 고뇌 
20. 수사지휘권 발동 
21. 사법개혁의 계기 
23. 공수처와 국가보안법 
24. 사임 
25. 마지막 비서실장 
26. 한미 FTA 
27. 남북 정상회담 
28. 노란 선을 넘어서 
29. 정치라는 것 
30. 미국 쇠고기 수입문제 
31. 그해 겨울 
32. 퇴임 
33. 청와대 떠나는 날 
34. 시골생활 
35. 농군 노무현 
36. 정치보복의 먹구름 
37. 비극의 시작 
38. 치욕의 날 

제 4부 운명 
1. 상주 문재인 
2. 그를 떠나보내며 
3. 눈물의 바다 
4. 작은 비석, 큰마음 
5. 국민의 마음을 새긴 추모박석 
6. 그가 떠난 자리 
7. 다시 변호사로 돌아오다 
8. 길을 돌아보다 
9. 운명이다



출판사 서평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문재인의 증언록 

『문재인의 운명』은 <노무현재단>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를 비롯한 30년 동행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노 대통령이 생전에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표현할 만큼 신뢰했던 평생의 동지, 문재인의 시각에서 본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증언입니다. 책에선 또, 두 사람의 ‘운명’ 같은 30년 동행을 통해서 본 자신의 삶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과 함께,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 가운데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문 이사장은 책의 서문에서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책을 쓰기로 생각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또 한 정권이 끝나간다. 국민들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가 역사에 반면교사(反面敎師)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역사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증언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지고 있는 첫 번째 책무는 자기가 보고 겪었고 일했던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에 교훈이 되고 참고가 될 내용을 역사 앞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는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이제 누군가는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었으며, 문 이사장이 처음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함께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는 물론 서거 이후 지금까지의 30여년 세월 동안의 인연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장본은 저자 사인과 부록으로 화보를 추가하여 담았으며, 소장용 한정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저자 서문] 

세월이 화살 같다.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이별한 지 어느덧 두 해가 됐다. 그 느낌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를 떠나보낸 날’은 여전히 충격과 비통함이며, 어떤 이들에게 ‘노무현’은 아직도 서러움이며 아픔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은 그리움이고 추억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기고 간 숙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노무현 시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머무를 순 없다. 충격, 비통, 분노, 서러, 연민, 추억 같은 감정을 가슴 한 구석에 소중히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시대의 짐’으로부터 놓아주는 방법이다. 그가 졌던 짐을 우리가 기꺼이 떠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다. 

2주기를 앞두고 사람들이 내게 책을 쓰라고 권했다. 이유가 있는 권고였다. 노 대통령은 생전에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서 솔직하고 정직해야 하는데, 아직은 솔직하게 쓸 자신이 없다고 했다. 혼자 하기에 벅차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공동 작업을 청했다. ‘함께 쓰는 회고록’으로 가자고 했다. 저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대를 기록해 보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에 당신이 하겠다고 했다. 

그 부탁을 했던 분도, 그 부탁을 받았던 우리도 미처 뭔가 해 보기 전에 갑작스럽게 작별해야만 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숙제는, 그와 함께 했던 시대를 기록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노 대통령과 오랜 세월을 같이 했고, 지금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내가 그 일을 맨 먼저 해야 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기록을 충실히 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하도 엄청나고 많은 일을 겪어, 자료를 보지 않으면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주저되는 부분도 많았다. 대통령이 고민했던 것처럼, 나 역시 100% 솔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많은 분들이 있는데, 자칫하면 이런 저런 부담을 드리거나 누가 될 소지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쓰기로 생각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또 한 정권이 끝나간다. 국민들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가 역사에 반면교사(反面敎師)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역사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증언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책무는 자기가 보고 겪었고 일했던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에 교훈이 되고 참고가 될 내용을 역사 앞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책을 정리하면서 보니, 참 오랜 세월을 그와 동행했다. 그 분은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가장 치열한 사람이었다. 그 분도, 나도 어렵게 컸다.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려 했고,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보고자 애썼다. 

그 열망을 안고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이룬 것도 많고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아쉬움이 많다. 후회되는 것도 있다. 견해의 차이로 마음이 멀어진 분들도 있다. 진보·개혁진영의 ‘과거 벗’들과도 다소 마음이 멀어진 듯하다. 우리뿐이 아니다. 진보·개혁진영 안에서도 상처와 섭섭함이 남아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 서거는 우리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줬다. 다음 시대를 함께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모아야 한다. 마음을 모아야 힘을 모을 수 있다. 

더 이상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애증(愛憎)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분은 떠났고, 참여정부는 과거다. 그 분도 참여정부도 이제 하나의 역사다. 그냥 ‘있는 그대로’ 성공과 좌절의 타산지석이 되면 좋겠다. 잘 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평가 받고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분도 그걸 원하실 것이다. 

노 대통령과 나는 아주 작은 지천에서 만나, 험하고 먼 물길을 흘러왔다. 여울목도 많았다. 그러나 늘 함께 했다. 이제 육신은 이별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와 그는, 정신과 가치로 한 물줄기에서 만나 함께 흘러갈 것이다. 바다로 갈수록 물과 물은 만나는 법이다. 혹은, 물과 물이 만나 바다를 이루는 법이다. 어느 것이든 좋다. 

이 같은 나의 절절한 마음을, 내가 좋아하는 도종환 시인이 한 편의 시에서 어쩌면 그리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이 땅의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결국은 강물이 되어 다시 만나고,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뤄 함께 흘렀으면 좋겠다. 강물은 좌로 부딪히기도 하고 우로 굽이치기도 하지만, 결국 바다로 간다. 장강후랑최전랑(長江後浪催前浪)이라고 했던가. 그러면서 장강의 뒷물결이 노무현과 참여정부라는 앞물결을 도도히 밀어내야 한다. 역사의 유장한 물줄기, 그것은 순리다. 부족한 기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 마뜩찮아 하던 나를 설득해 책을 내도록 권고한 분들이 꽤 많다.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방대한 양의 내 녹취와 증언을 꼼꼼히 정리하여 자료로 만들어 주느라 고생한 양정철 전 비서관에게 특히 고마움을 전한다. 그 작업이 없었으면 나는 책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원고를 자신의 것인 양 정성껏 봐주고, 의견을 주신 분들의 노고도 고맙기만 하다. 책을 완성해 준 <가교출판> 식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 모든 분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노 대통령 2주기에 맞춰 발간해, 그 분 영전에 헌정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열심히 정리했지만 부족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이 책이 그 분이 바랐던 ‘함께 쓰는 회고록’의 출발점이기를 바란다. 그 분과 함께 했던 다른 분들의 알찬 기록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2011년 6월 
문 재 인 

Ⅰ. 서거 전후 

■ 노 대통령 시신 참혹…유족 충격 고려 사전 수습 
- 사실상 현장에서 서거…‘09:30’은 법률적 시점
 

병원에 도착했다. 마중 나와 있는 문용욱 비서관의 표정이 참담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대통령님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특실에 모셔져 있었다. 얼마나 안 좋은 상태인지 눈으로 봐야 했다. 병실에 들어섰다. 눈을 감고 말았다.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처참한 모습이었다. 
의료진들이 사실대로 알려줬다. 인공심장박동으로 연명하고 있어 신호가 잡히는 것이라 했다. 장치만 제거하면 신호는 바로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도 ‘행여나…’ 하는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의사가 더 분명하게 말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의학적으로는 사망한 상태였고, 중간에 들렀던 ‘세영병원’ 소견도 같다고 했다. 대통령님 상태로 보면, 사고현장에서 바로 돌아가신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인공 심장박동 장치는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처치를 다해주길 바랄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붙여놓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담당 의사가 말했다. 
“여사님이 오시면 전혀 가망 없는 상태라는 걸 말씀드리고 동의를 받아 인공연명장치를 제거해야 합니다. 저희가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니, 실장님이 먼저 좀 말씀해 주십시오.” 

곧 도착하실 여사님께 대통령님 모습을 어떻게 보여드릴 것인지가 먼저 걱정됐다. 의료진에게 그 걱정을 말했다. 그들도 공감했다. 의료진들은 얼마 후 도착한 여사님을 기다리게 하면서, 황급히 손을 써 줬다. 여기저기 찢어진 부분을 모두 봉합하고 피도 깨끗이 닦아냈다. 시신을 어느 정도 수습하기 전, 참혹했던 모습 그대로를 본 건 경호관과 문용옥 비서관과 나 밖에 없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여사님이, 의료진의 연락을 받고 겨우 부축을 받아 대통령님을 만났다. 거짓말처럼 깨끗한 모습이었다. 얼굴에 아무 상처가 없었다. 표정이 온화하기까지 했다. 여사님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실신을 했다. 불과 두 세 시간 전까지 함께 있던 남편의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여사님에게 상황을 사실대로 설명 드리는 것이었다. 여사님은 그냥 ‘산에서 떨어지셨는데 좀 위급하다’ 정도로만 알고 달려오셨다. ‘세영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 없어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라는 짐작만 하고 계셨다. 비서들이 차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씀드렸다.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뛰어내리셨다고. 못 믿으셨다. 유서를 보여드렸다. 여사님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 했다. ‘인공심장박동 장치에 의존하고 있을 뿐, 의학적으로는 이미 돌아가신 것이다, 전혀 가망이 없다고 한다, 인공연명 장치를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여사님이 결심하셔야 한다, 그냥 가시도록 놓아드리자…. 의료진도 확인을 해줬다. 
여사님의 오열과 통곡 앞에서 나도 나를 가누기 어려웠다. 고통스런 일이었다. 실신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던 여사님께서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신 후에 동의를 했다. 인공심장 박동기를 제거했다. 
2009년 5월23일, 오전 9시30분이었다. 그 분을 떠나보냈다. 

■ 유서 첫 문장 나중에 추가…마지막 순간에도 글 손질 

유서를 처음 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나를 못 견디게 했던 건, 이분이 ‘유서를 언제부터 머리에 담고 계셨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다듬을 수 있는 글이 아니므로, 대통령은 아무도 몰래 머리속에서 유서를 다듬었을 것이다. 
첫 문장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나머지 글을 모두 컴퓨터에 입력한 후 추가로 집어넣었다. 그답게 마지막 순간에도, 입력한 유서를 읽어보고 다시 손을 본 것이다. 대통령이 마지막 얼마동안 머리속에 유서를 담고 사셨으리라는 생각이 지금도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홈페이지에 “여러분은 나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려도 나는 대통령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Ⅱ. 수사 전후 

■ 한 번도 화내지 않고 달관한 것처럼 끌어안아 


그 시기 대통령은 좀 이상했다. 당시 대통령도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다가, 사실관계 파악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와 같이 사실관계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평소 같으면 굉장히 야단을 치고 화를 내실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내 우리 앞에서는 큰 소리 한번 안 치셨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보였다. 도저히 달관할 수 없는 일을 달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다 내 책임이다. 내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장래에 대해 아무런 믿음을 못주니 집사람과 정상문 비서관이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오래 정치를 하면서 단련이 됐지만, 가족들은 단련시키지 못했다”는 말도 했다. 
대통령은 여사님뿐 아니라 정상문 비서관에 대해서도, 비록 당신 모르게 벌어진 일이지만 모두 끌어안으려 했다. 정상문 비서관에게는 당신이 시켜서 한 일로 진술하라고 시켰다. 정 비서관은 대통령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글을 써서 당신이 한 일이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얼마 후에는 다시 글을 올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대통령은 우리를 보는 일조차 민망해 하고 면목 없어 하셨다. 내게 그런 심정을 직접 토로하기도 했다.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했던 분이 당시 상황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변호인단 모두 무죄 확신…그래서 서거 더 충격 

그 날까지의 과정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검찰이 기소를 하고 나면 법원에서의 승부는 자신을 했다. 검찰과 언론이 아무리 ‘여론재판’, ‘정치재판’을 해도, 법은 법이다. 수사기록의 부실함을 덮을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이 갖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리한 수사나 조작은 한계가 있다. 그 사건이 그랬다. 이길 수 있었다. 
검찰의 대통령 소환 조사는 마지막 수순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신병처리를 하든가, 불구속 기소라도 하든가, 아니면 무혐의 처리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검찰 조사가 끝난 이후에도 아무 처리를 못한 채 질질 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찰도 공소유지가 될 지에 대한 판단을 해 봤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이 그 동안 해왔던 모든 수사가 무너져버리는 셈이 된다. 불구속기소를 하더라도 공소유지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무 처리도 못하고 끌기만 한 것이다. 언론을 통한 모욕주기와 압박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이나 변호사들 모두, 검찰이 기소하더라도 무죄를 받는 것엔 문제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이 그렇게 자신을 모두 던져 버릴 결심을 하고 계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 가난하게 떠난 대통령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운동이었다.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변호사 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곳이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에게 퇴임 이후의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재산보다 4억 원 가량 더 많았다. 

Ⅲ. 참여정부 비화 

■ 첫 조각 뒷얘기
 

최대 파격은 강금실 법무부장관이었다. 당시 판사를 거쳐 민변 부회장을 하고 있던 강금실 변호사를 추천한 건 나였다. 내 추천은 그녀를 법무부장관으로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여성 장관을 발탁해 온 방식대로 환경부장관이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발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선인은 그녀에 대해 자세히 묻더니, 그렇다면 법무부장관으로 하자고 했다. 내가 깜짝 놀랐다. 너무 부담이 컸다. 
환경부나 보건복지부 쪽을 먼저 맡겨 본 다음에, 법무부 쪽을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다. 당선인은 생각이 달랐다. 여성 몫으로 환경부, 보건복지부, 여성부 또는 교육부를 벗어나지 못했던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성 전유물처럼 생각돼왔던 자리에까지 여성들을 과감하게 발탁해야 한다는 게 당선인의 뜻이었다. 

대통령의 여성관은 진취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여성의 능력이 남성과 비슷하다면, 그 여성은 훨씬 더 능력 있다는 생각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당선인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환경부 장관을 했던 김명자씨를 건설교통부 장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여성의 적극적 발탁 의미와 함께 환경마인드에 입각한 건설행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새만금사업과 경인운하 등이 큰 사회적 갈등요인이어서, 건설과 환경의 조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 고건총리 내정자와의 협의과정에서 불발로 끝났다. 
여성의 본격적 발탁이라는 당선인 의지는 참여정부 출범 후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 최초 및 복수의 여성대법관,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순으로 이어졌다. 

■ 검찰과의 관계 

우리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되려면, 검사들이 정치적 줄 세우기에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신분을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검찰총장의 임기보장도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은 정부 출범 후에도 이전 정부에서 임용된 김각영 검찰총장을 교체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김각영 총장이 내게 대통령의 의중을 물어온 일도 있었다. 전혀 그런 뜻이 없으니 임기를 지키시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당시 검찰 고위급 간부들은 단단히 오해를 하고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새 정부가 과거 식의 인사로 자신들을 모두 밀어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통령과 우리는 검찰개혁의 출발선을,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봤다. 즉 ‘정치검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개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이 목표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검찰 스스로 정권의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는 ‘문화의 문제’로 봤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직간접으로 당신의 그런 의지를 전달했다. 민정수석실도 검찰에 주요 사건의 지시 내지는 조율을 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참여정부 기간 내내 철저하게 견지했다. 대선자금 수사로 대통령 측근들에게까지 수사의 칼날이 와도 검찰이 원칙과 소신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모두 허용했다. 우리 쪽의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검찰수사의 독립성과 중립을 보장해 줬다. 그렇게 마련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앞으로 검찰 스스로 잘 지켜나가길 원했다. 
검찰을 장악하려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 반기문 총장이 나오기까지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부터 반 총장을 염두에 두고 외교적 노력을 했던 건 아니다. 당초엔 홍석현 주미대사가 그 자리를 꿈꿨다. 차기 사무총장은 아시아 몫이라는 공감대가 있을 때여서 본인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안기부 X파일’ 도청테이프 사건이 생겨 돌연 낙마했다. 그 바람에 반기문 장관이 후보가 됐다. 반 총장으로선 어찌 보면 굉장히 운이 좋았다. 참여정부는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을 다 했다. 대통령은 모든 순방외교에서 그의 지지를 부탁했다. 총리의 해외방문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을 주요국에 특사로 보내, 지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임박해서는 다른 국가원수들에게 전화도 많이 했다. 
그런 노력들이 효과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고위급 외교전이 아니었다. 범정부적인 외교노력은 마지막 단계에 꽃을 따는 과정에 불과했다. 반 총장의 당선이 가능했던 건, 당시 참여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균형외교 정책 때문이다. 

대통령은 반 총장 선출소식을 듣고 아주 반가워했다. 축하전화로 따뜻한 덕담을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당신이 그렇게 공을 들여 빛을 본 일이라 생색을 낼 법한데도 청와대나 부처에 그리 못하도록 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기울인 그간의 노력이나 비사(秘史)도, 정부가 생색을 내거나 자축하는 일정도 절제토록 지시했다. 심지어 KBS가 나라의 경사라며 마련한 <열린음악회>조차도 정부는 함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그가 국제지도자로서 소신껏 일을 하도록, 편하게 놔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정부가 생색을 내면 낼수록 그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깊고 세심한 마음 씀씀이였다. 

Ⅳ. 회고와 희망 

■ 2012년 집권을 생각하며
 

진보·개혁진영의 집권을 위한 통합 또는 연대가 논의되고 있다. 지난 4ㆍ27 재보선은 야권후보 단일화의 위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해 온 단일화 방식의 한계도 보여줬다. 정당간의 경쟁을 통한 단일화 방식은, 단일화 자체도 늘 진통을 겪게 마련이거니와 단일화되더라도 자칫하면 시너지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나는 통합이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경우 민주당과 다른 정당들 간에 존재하는 현저한 힘의 격차가 충분히 고려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정당의 입장에서 볼 때 통합은 곧 민주당에 의한 흡수 소멸이란 의구심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될 필요가 있다. 

통합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것은, 집권 후를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단일화만으로는 집권 후의 분열을 막기 어렵다. 단일화야 한나라당의 계속 집권을 막기 위한 공동의 목표만으로, 또는 최소 강령의 합의만으로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집권 후의 공동보조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집권 후에도 함께 힘을 모아 개혁의 동력을 유지해 나가려면 더 높은 차원의 연대가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 사회 정치지형에서 진보적 성향이 다수를 이뤄 진보·개혁진영 안에서 헤게모니 싸움을 벌여도 대세를 그르치지 않게 될 때까지는 통합된 정당의 틀 안에서 정파 간의 연립 정부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때 민주노동당이 추천하는 인사를 노동부장관으로 입각시키고 싶어 했다. 
민노당이 추천한 인사라면, 그가 당적을 유지한 채 개인적으로 입각해도 좋다고 했다. 참여정부 노동정책이 노동계로부터 안정적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되고, 민노당도 국정경험과 함께 보다 더 책임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제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이 과반수가 되고 민노당도 크게 약진했을 때부터였다. 두어 번 개각 때마다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당시 우리 정치문화에서 민노당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선 민노당 당원들이 용납할 리 없었다. 당 지도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당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 뻔했다. 우리도 정치공작이나 야합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그와 같은 강고한 벽을 뛰어 넘기 위해서도 통합과 연립정부를 처음부터 구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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