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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닦는 요긴한 편지글 (성철스님이가려뽑은한글선어록05) (원오극근 스님의 원오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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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마음 닦는 요긴한 편지글 (성철스님이가려뽑은한글선어록05) (원오극근 스님의 원오심요)
정가 18,000원
판매가 16,200원
저자/출판사 원오극근/벽해원택/장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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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9390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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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철스님이 가려 뽑은 한글 선어록 제5권 『마음 닦는 요긴한 편지글』은 원오극근 스님의 원오심요가 담겨 있습니다.

    저자소개

    저자 : 원오

    역자 : 벽해 원택 (감역)


    목차

    한글 선어록을 발간하면서 … 005 
    해제(解題) … 009 
    원오심요(悟心要) 서(序) … 022 


     
    원오심요 상 
     

    01. 화장(華藏) 명(明) 수좌(首座)에게 주는 글 … 026 
    02. 장선무(張宣撫) 상공(相公)에게 드리는 글 … 042 
    03. 장선무(張宣撫) 상공(相公)에게 함께 부치는 글 … 044 
    04. 원(圓) 수좌(首座)에게 주는 글 … 049 
    05. 유(裕) 서기(書記)에게 주는 글 … 059 
    06. 융(隆) 지장(知藏)에게 주는 글 … 066 
    07. 법왕(法王)의 충(沖) 장로(長老)에게 주는 글 … 072 
    08. 법제(法濟) 선사(禪師)에게 주는 글 … 079 
    09. 고() 서기(書記)에게 주는 글 …082 
    10. 보령(報寧)의 정(靜) 장로(長老)에게 주는 글 … 088 
    11. 개성사(開聖寺) 융(隆) 장로(長老)에게 주는 글 … 093 
    12. 보현사(普賢寺) 문(文) 장로(長老)에게 주는 글 … 095 
    13. 정주(鼎州) 덕산(德山) 정(靜) 장로에게 주는 글 …102 
    14. 담주(潭州) 지도(智度) 각(覺) 장로에게 주는 글 … 104 
    15. 촉중(蜀中)의 축봉(鷲峰) 장로에게 주는 글 … 107 
    16. 현(顯)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110 
    17. 간(諫) 장로에게 주는 글 … 115 
    18. 원(元) 선객(禪客)에게 주는 글 … 117 
    19. 고()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119 
    20. 온초(蘊初) 감사(監寺)에게 주는 글 … 121 
    21. 일(一) 서기(書記)에게 주는 글 … 124 
    22. 일(一) 서기(書記)에게 준 법어에 덧붙여 … 127 
    23. 종각(宗覺)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30 
    24. 광(光)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36 
    25. 민(民)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38 
    26. 재(才)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41 
    27. 찬(璨)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151 
    28. 찬(璨)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156 
    29. 영(寧) 부사(副寺)에게 주는 글 … 160 
    30. 상(詳)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61 
    31. 혜(慧)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64 
    32. 수도하는 약허(若虛) 암주(菴主)에게 주는 글 … 166 
    33. 양(良) 노두(蘆頭)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169 
    34. 허(許) 봉의(奉議)에게 드리는 글 … 172 
    35. 해(諧) 지욕(知浴)에게 주는 글 … 177 
    36. 인(印)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184 
    37. 신(信) 시자에게 주는 글 … 187 
    38. 조인(祖印) 사미에게 주는 글 … 189 
    39. 민(民) 지고(知庫)에게 주는 글 … 191 
    40. 서울을 떠나는 자문(自聞) 거사를 전송하면서 … 199 
    41. 용(湧) 도자(道者)에게 주는 글 … 201 
    42. 실(實)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03 
    43. 추(樞)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205 
    44. 실(實) 선노(禪老)에게 주는 글 … 207 
    45. 영(瑛)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09 
    46. 천(泉)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11 
    47. 사(思)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213 
    48. 걸(傑)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14 
    49. 성(成) 수조(修造)에게 주는 글 … 216 
    50. 유(逾)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19 
    51. 정(淨)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223 
    52. 견(堅) 도자(道者)에게 주는 글 … 225 
    53. 상(尙)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227 
    54. 영(瑛)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28 
    55. 승(昇)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232 
    56. 민(民)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35 
    57. 심(心) 도자(道者)에게 주는 글 … 238 
    58. 조(照) 도인에게 주는 글 … 242 
    59. 윤(倫)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46 
    60. 정(正)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248 
    61. 성연(性然) 거사에게 드리는 글 … 250 
    62. 혜공(慧空) 지객(知客)에게 주는 글 … 252 
    63. 장(張) 직전(直殿)에게 드리는 글 … 258 
    64. 호(胡) 상서(尙書) 오성(悟性)에게 드리는 권선문(勸善文) … 262 
    65. 장선기(張宣機) 학사(學士)에게 드리는 글 … 266 
    66. 동감(同龕) 거사 부신지(傅申之)에게 드리는 글 … 269 
    67. 황성숙(黃聲叔)에게 드리는 글 … 276 
    68. 증(曾) 대제(待制)에게 드리는 글 … 277 
    69. 여(呂) 학사(學士)에게 드리는 글 … 280 
    70. 촉(蜀) 태수 소중호(蘇仲虎)에게 드리는 글 … 281 

     
    원오심요 하 
     

    71. 황(黃) 태위(太尉) 검할(鈐轄)에게 드리는 글 … 284 
    72. 뇌공달(雷公達) 교수(敎授)를 전송하면서 …289 
    73. 거제(巨濟) 요연(了然) 조봉(朝奉) … 294 
    74. 장중우(張仲友) 선교(宣敎)에게 드리는 글 …298 
    75. 문덕(文德) 거사에게 드리는 글 … 304 
    76. 흥조(興祖) 거사에게 드리는 글 … 306 
    77. 초연(超然) 거사에게 드리는 글 … 309 
    78. 위(魏) 학사(學士)에게 드리는 글 … 311 
    79. 가중(嘉仲) 현랑(賢良)에게 드리는 글 … 315 
    80. 방청로(方淸老)에게 드리는 글 … 318 
    81. 이의보(李宜父)에게 드리는 글 … 320 
    82. 한(韓) 통판(通判)에게 드리는 글 … 322 
    83. 장(張) 국태(國太)에게 드리는 글 … 323 
    84. 장자고(張子固)에게 드리는 글 … 327 
    85. 원빈(元賓)에게 드리는 글 … 331 
    86. 증(曾) 소윤(少尹)에게 드리는 글 … 338 
    87. 장(蔣) 대제(待制)에게 드리는 글 … 340 
    88. 영(寧)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47 
    89. 승(勝)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50 
    90. 침(琛)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52 
    91. 영(英)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54 
    92. 원(圓)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57 
    93. 조(照)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60 
    94. 감(鑑)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63 
    95. 조(祖)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67 
    96. 연(宴)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69 
    97. 종(從) 대사(大師)에게 드리는 글 … 371 
    98. 조(祖)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73 
    99. 제(諸)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378 
    100. 양주(楊州)의 승정(僧正) 정혜(淨慧) 대사(大師)에게 드리는 글 … 380 
    101. 각(覺)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83 
    102. 자(自)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86 
    103. 유(有)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88 
    104. 월(月)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92 
    105. 본(本)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95 
    106. 달(達)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397 
    107. 인(印)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402 
    108. 묘각(妙覺) 대사(大師)에게 드리는 글 … 404 
    109. 인(仁) 서기(書記)에게 주는 글 … 407 
    110. 이연(怡然) 도인(道人)에게 답하는 글 … 409 
    111. 황(黃) 통판(通判)에게 답하는 글 … 411 
    112.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415 
    113. 조(詔) 부사(副寺)에게 주는 글 … 418 
    114. 등(燈) 상인(上人)에게 주는 글 … 423 
    115.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425 
    116. 노수(魯)에게 드리는 글 … 428 
    117. 선자(禪者)에게 주는 글 … 432 
    118.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436 
    119. 원유(遠猷) 봉의(奉議)에게 드리는 글 … 441 
    120. 엄(嚴) 수(殊) 두 도인에게 주는 글 … 445 
    121. 도명(道明)에게 주는 글 … 448 
    122. 시자 법영(法榮)에게 주는 글 … 450 
    123. 도인(道人)에게 드리는 글 … 452 
    124. 중선(仲宣) 유나(維那)에게 주는 글 … 455 
    125. 중송(中) 지장(知藏)에게 주는 글 …458 
    126. 전차도(錢次道) 학사(學士)에게 드리는 글 … 461 
    127. 처겸(處謙) 수좌(首座)에게 주는 글 … 465 
    128. 오(悟) 시자(侍者)에게 주는 글 … 469 
    129. 풍희몽(馮希蒙)에게 드리는 글 … 471 
    130. 화엄(華嚴) 거사(居士)에게 드리는 글 … 474 
    131. 무주(無住) 도인(道人)에게 주는 글 … 476 
    132. 원장(元長)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478 
    133. 단하(丹霞) 불지유(佛智裕) 선사(禪師)에게 주는 글 … 481 
    134. 경룡학(耿龍學)에게 보낸 편지 끝에 붙인 글 … 483 
    135. 양무구(楊無咎) 거사(居士)에게 드리는 글 … 485 
    136. 성도(成都)의 뇌공열(雷公悅) 거사(居士)에게 드리는 글 … 488 
    137. 덧붙이는 글 … 491 
    138. 장지만(張持滿) 조봉(朝奉)에게 드리는 글 … 493 
    139. 오(吳) 교수(敎授)에게 드리는 글 … 498 
    140.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 502 
    141. 한(韓) 조의(朝議)에게 드리는 글 … 503 
    142. 증(曾) 대제(待制)에게 드리는 글 … 507 
    143. 종각(宗覺) 대사(大師)에게 드리는 글 … 509

    책 속으로

     
    화장(華藏) 명(明)수좌(首座)에게 주는 글 
    강녕부(江寧府) 천녕사(天寧寺)에 머물다 

    곧바로 보여주는 조사선에 어찌 샛길을 용납하리오. 여기서는 향상인(向上人)만을 오직 귀하게 여길 뿐이다. 그들은 듣자마자 곧 들어 보이고 뽑아들자마자 당장 가니, 설사 밝은 눈으로 엿본다 해도 벌써 바보짓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모서리를 들어 주었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돌이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 상대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하나를 들면 나머지 셋을 알고 눈대중으로 아주 작은 차이를 알아내어 수레바퀴가 데굴데굴 굴러가듯 전혀 막힘이 없어야 ‘향상의 수단을 쓴다[提持]’고 할 수 있으리라. 
    듣지 못하였느냐? 양수(良遂)스님이 마곡(麻谷)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뵙자마자 마곡스님은 방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그가 의심을 품고 있다가 두 번째 다시 찾아뵙자 이번에는 마곡스님이 채소밭으로 휙 가버렸다. 그러자 양수스님은 단박에 깨닫고 마곡스님에게 말하였다. 
    “스님!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스님을 찾아와 뵙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12부 경론에 속아서 지낼 뻔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을 보면 그는 참으로 힘을 덜었다[省力] 하겠다. 
    양수스님은 되돌아와서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이 아는 것을 나는 모조리 알지만 내가 아는 것은 여러분이 모르리라.” 하였다. 
    확실하게 알라. 양수스님이 안다 한 것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자리여서 다른 사람들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니 진짜 사자라 할 만하다. 그 집안의 종지를 잇는 법손이 되려면 반드시 그의 경지를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달마(達摩)스님이 양(梁)나라에 갔다가 위(魏)나라로 가서 낙초자비(落草慈悲)로 사람을 찾으며 소림(少林)에서 9년을 홀로 앉아 있었다. 이때 깊은 눈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마지막에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자 다만 세 번 절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니 마침내 “골수를 얻었다.”는 말이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리는[守株待兎]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말없이 절하고 제자리에 선 것’이 골수를 얻은 심오한 이치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칼이 멀어진 지가 오래인 줄은 전혀 모르고 이제야 뱃전에 새기는 격[刻舟求劍]이니 어찌 꿈엔들 달마스님을 뵐 수 있겠는가. 
    진정한 본색도류(本色道流)라면 반드시 정견(情見)을 벗어나서 별도의 생애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니, 결코 썩은 물속에서 살아날 계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집안의 가업을 계승하리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유하혜(柳下惠)의 일을 잘 배우면서도 결코 그의 자취를 본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사람은 “합당한 한마디 말이 만 겁에 노새를 매는 말뚝이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다. 
    유(有)를 타파한 법왕(法王,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의 욕구에 따라 갖가지로 법을 설하시나, 그 설법은 모두 방편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만 집착과 의심을 부수고 알음알이와 아견(我見)을 부숴주기 위해서이니, 그 많은 잘못된 깨달음과 잘못된 견해가 없다면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시지도 않을 터인데, 더욱이 갖가지 법을 설할 까닭이 있겠는가. 

    출판사 서평

    『원오선사심요(悟禪師心要)』는 『벽암록(碧巖錄)』으로 널리 알려진 불과(佛果) 원오극근(悟克勤, 1063~1135, 임제종 양기파) 스님에게 당시 법을 묻는 선승과 사대부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답서로 써 보낸 편지글을 모아 펴낸 서간집이다. 
    원오극근 선사는 팽주(彭州), 즉 사천성(四川省, 중국 서쪽 내륙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자,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촉[蜀] 땅) 성도부(成都府) 사람으로 자(字)는 무착(無着), 속성은 락(駱) 씨이다. 대대로 유학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절에 놀러 갔다가 느낌을 받고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문조(文照)나 민행(敏行, 1044~1100) 등의 법사에게 『능엄경(楞嚴經)』 등 경론을 배우다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문자공부를 반성하였다. 행각을 떠나 옥천승호(玉泉承皓, 1012~1092), 대위모철(大慕喆, ?~1095), 황룡조심(黃龍祖心, 1025~1100),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1091) 등 여러 선지식에게 법을 물었다. 마지막으로 임제종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태평산(太平山)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선사를 찾아가 단련을 받고 인가를 얻었다. 1102년(40세)에 출신지인 성도(成都) 소각사(昭覺寺)에 주지하였고, 1124년(62세)에 변경(京,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의 천녕(天寧) 만수사(萬壽寺)에 주석하였다. 
    원오스님은 밖으로 몇 대에 걸친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으며 안으로는 선불교 중흥을 위해 공안참구를 체계 있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등 걸출한 선승들을 배출하여 임제선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오스님이 살았던 11세기 중반에서 12세기 중반은 거란과 여진 등 이민족의 침탈과 내정의 실패로 송(宋) 왕조가 위기에 처한 때였다. 특히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개혁의지(1069)가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정책대결로서의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대립이 아니라 인맥만 남은 신당과 구당 세력이 쟁점 없는 싸움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도 건국 초부터 역대 왕들의 귀의를 받아 오던 불교는 국가 권력의 보호 아래 대토지를 소유하고 귀족들과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1126년 송이 여진의 금에 패하면서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에 사로잡힌 정강(靖康)의 변 이후에 정치 무대가 강남(江南)으로 옮겨지면서, 이전 시대에 충의왕(忠懿王) 전숙(錢, 929~988)의 노력으로 불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는 새로운 발전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때 불교는 선(禪), 정토(淨土), 천태(天台)가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데, 이 중 사천(四川) 출신 승려가 다수를 차지했던 임제종 양기파 선승들이 장상영(張商英, 1044~1122)이나 소식(蘇軾, 1036~1101) 등 사천 출신 고위 관료층의 귀의를 받으며 강남불교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임제종 선승들은 선불교 중흥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특히 그때까지 내려오던 선 참구법에 대해서 더욱 조직적인 설명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원오스님의 몇 가지 저술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대표적인 예이다. 공안 참구를 체계화한 것은 오조법연에서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오조법연은 ‘무’자 공안을 참구하라고 강조하였다. 
    원오스님의 특징은 여러 조사들의 공안과 기연 언구들을 매 편마다 제시하긴 하나, 그것을 하나로 일관토록 하지 않고 여러 개의 공안들을 동시에 제시해 줌으로써 그것을 지표 삼아 구경(究竟)을 직하(直下)에 깨닫도록 강조한 점이다. 반면, 대혜종고에 와서는 오직 ‘무’자 공안 하나만을 끝까지 참구하여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찾도록 강조하였다. 더러는 ‘간시궐(幹屎)’ 등 다른 몇 개의 공안들을 동시에 제시하긴 하나, 주로 한 개의 공안으로 결판내도록 하는 간화선이 확립된 것은 대혜에 와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법연-원오-대혜의 3대(代)로 이어지는 간화선 확립 시기에 원오스님의 『심요』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법어들이다. 
    원오스님의 저술 중에 이 『심요』는 평생 썼던 편지글을 제자들이 모아서 펴낸 책이다. 건염(建炎) 3년(1129, 저자 67세) 단하(丹霞) 불지유(佛智裕, 1085~1150) 선사에게 보낸 편지까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의 말년이나 사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심요’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하나같이 직지단전(直指單傳)의 종지를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선문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교리적인 설명이나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을 매 편에서 강조하였다. 옛 선지식들의 기연(機緣)이나 말씀들을 종지를 이해하는 착안점으로 제시하면서, 참선하는 납자의 본분자세나 선지식으로서 가져야 할 안목과 삶의 태도 등을 편지 받을 사람의 공부 정도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가며 자세하게 지시해주고 있다. 
    특히 송대에는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 참선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심요』에서도 사대부들에게 주는 편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송대에 만들어진 다른 저술들과는 달리 『심요』에서는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염불이나 기도, 혹은 당시 사회문제나 불교계에 있었던 사건 등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고 오로지 화두참선으로 일관된 이야기뿐이다. 그런 만큼 『심요』는 임제종 선승들 사이에 종안(宗眼)을 판가름하는 지침서로 읽혀 왔음을 알 수 있다. 대혜스님의 편지글을 모은 『서장(書狀)』도 형식상 『심요』와 닮은 점으로 보아 『심요』를 답습한 것으로 짐작된다. 
    『심요』에는 상권에 70편, 하권에 73편, 모두 143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이 중 사대부들과 나눈 편지는 42편이다. 

    원오심요(悟心要) 서(序) 
     

    전할 수 없는 소실봉(少室峰)의 묘법을 각자의 그 자리에서 들어 보이자니 지적해 보일 모양도 없고 가리켜 보일 모퉁이도 없으며 설명할 말도 없고 펼쳐 보일 도리도 없다. 텅텅 비어 터럭만큼도 없고 조짐조차도 떠나서 원만고요하며 진정묘명(眞正妙明)하다. 시방의 허공을 관통하고 법계를 둘러싸니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다. 공(空)이 이를 말미암아 공(空)이 되지만 공과 섞일 수 없고, 색(色)이 이를 의지하여 색이 되지만 색과 같을 수 없다. 바닷물 속에 짠맛이 녹아 있듯 미혹한 범부 속에 들어가고 단청 물감에 아교풀이 들어 있듯 깨달은 성인과 함께한다. 
    설산(雪山)의 대사문은 지혜와 말솜씨가 끝없이 깊고 넓었다. 3백여 회에 걸쳐 근기들을 틔워 주신 그 말씀은 심원하고도 활달하였다. 대자재를 갖추어 열었다 닫았다 폈다 말았다 하면서 비밀스럽고도 그윽하게 들춰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독 이 일에만은 한 글자 한 획도 그을 수 없었으니, 지극한 성인의 큰 생각이며 지극한 신령의 현묘한 창고라 할 만하다. 
    원오(悟)스님은 동산법연(東山法演, ?~1104) 스님께 법을 얻은 분이다. 안목이 밝고 틀이 활달하며 마음이 툭 트였고 말이 완벽하였다. 하나의 방편만을 고집하지 않고 참선하는 무리들에게 가르침을 열었는데 그것이 흘러 넘쳐 큰 책이 되었다. 그것을 『심요(心要)』라고 제목을 붙였으니 말 없는 가운데 말을 드러내고 모양 없는 가운데 모양을 드리운 것이다. 근기에 맞게 응대해서 그들의 속박을 풀어주고 그들의 짐을 놓아주되 많아도 번거롭지 않고 적어도 소략하지 않아서 어디를 가나 요점을 얻고 어디를 가나 근원을 만나게 하였다. 그 통쾌하고 빠른 점에서는 한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시라 했던 마조(馬祖, 709~788)스님의 면모를 높이 사고, 세밀하고 단속하는 점에서는 그저 한가로움을 지킨 암두(巖頭, 828~887)스님이나 마음에 아무 일 없었던 덕산(德山, 782~865)스님을 중히 여겼다. 
    초학 지도에는 반드시 실참(實參)을 하도록 했다. 밥도 잠도 잊고 사랑과 증오를 다 없애며,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놓아서 한구석도 막힌 데 없이 기륜(機輪)을 활짝 벗어나게 하였다. 태엽을 돌리듯 얼굴을 바꿔 한입에 물어뜯고 앉은 자리를 홱 틀어 버리니 거기에 어찌 머뭇거림을 용납하겠는가. 마치 커다란 구름이 홀연히 변화하면서 천지를 다시 짜듯, 단비가 내려 초목을 고루 적시고 흘러서 강물로 퍼지듯 하였다. 잠깐 사이에 안개가 걷히듯 하니 오고 간 흔적을 찾으려 하나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법을 얻어 자재한 이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법을 설한 한 분의 종사라 하겠으니 비록 임제(臨濟, 767~866)?덕산이라 해도 이 앞에서는 옷깃을 여며야 할 것이다. 그는 반야종지를 맛보아 적겁토록 훈습단련을 쌓았으므로 이러한 걸림 없는 원만자재를 얻은 것이리라. 
    감복 속에서 이 책을 두 번 세 번 읽고는, 깊숙이 절하고 이 글을 쓴다. 진정코 원오스님께서 대적정문(大寂定門)에서 행여라도 고개 끄덕여주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 가르침이 외롭게 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원(元) 천목산(天目山) 중봉선사(中峰禪師) 명본(明本)이 적다[題] 

     
     
    1 하남성(河南省) 등봉시(登封市)에 숭산(嵩山)이 있는데, 이 산의 동서 봉우리를 각각 소실산(少室山)과 태실산(太室山)이라고 부른다. 이 소실산에 보리달마가 선을 전한 소림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실’은 달마대사의 선을 가리킨다. 
    2 “水中鹹味(수중함미) 色裏膠靑(색리교청)” :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심왕명(心王銘)』에 보인다. 
    3 방거사(龐居士, ?~808)가 “만 가지 진리와 짝이 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마조도일이 “거사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버린 후에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사가어록(四家語錄)』(X69-4c). 

    [책속으로 추가] 

    옛사람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는 깊은 산 초막이나 돌집 속에서 다리 부러진 솥에 밥을 해 먹으며 10년이고 20년을 지냈다. 그리하여 세상사를 모두 잊고 티끌세계를 영원히 떠났었다. 요즈음 시대엔 감히 그와 같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명예와 자취를 버리고 본분을 지키며 무뎌진 송곳 같은 납자가 되어 몸소 깨달은 바를 자기 역량에 따라 쓰면서 지난 업을 소멸하고 오래도록 익혀 온 습성을 녹여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반야의 인연을 맺어 주어야 한다. 자기의 근본이 익도록 연마하기를 거친 풀숲을 헤치고 한 개나 반 개를 얻듯이 하여 불법이 있음을 같이 알고 생사를 함께 벗어나야 한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렇게 하여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에 보답해야만 한다. 
    설사 인연이 무르익어 부득이 세속에 나와 인연 따라 사람과 하늘 중생들을 제도하더라도 결코 무엇이라도 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물며 부귀하고 세력 있는 이들과 결탁하여 세속에 물들고 아부하는 그런 스님들의 행동거지를 본받아 범부와 성인을 속이는 짓을 하랴. 나아가 구차하게 잇속과 명예만을 탐내어 무간업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설사 깨달을 계기는 없다 해도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 일은 없으리니, 참으로 번뇌의 세계를 벗어난 아라한(阿羅漢)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스님이 천황(天皇, 748~807)스님에게 “무엇이 계정혜(戒定慧)입니까?” 하고 묻자 천황스님이 “여기 나에겐 그런 부질없는 살림살이는 없다.” 하였다. 또 덕산(德山, 782~865)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덕산스님은 “부처는 서천(西天)의 늙은 비구다.” 하였다. 또 석두(石頭, 701~791)스님에게 “무엇이 도입니까?” 하고 묻자 “나무토막이다.” 하였고, “무엇이 선입니까?” 하고 묻자, “벽돌이다.” 하였다.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스님에게 “무엇이 불조(佛祖)를 초월한 이야기입니까?” 하고 묻자 “호떡이지.” 하였고, 또 조주(趙州, 778~897)스님에게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뜰 앞의 잣나무다.” 하였다. 또 청평(淸平, 832~906)스님에게 “무엇이 유루(有漏)입니까?” 하였더니 “조리(籬)”라 하였고, “무루(無漏)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무 국자”라고 하였으며, 삼각(三角)스님에게 “3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쌀, 조, 콩”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모두는 지난날 본분종사(本分宗師)가 실제의 경지를 몸소 밟아 보고 본분자리에서 자비를 베푼 말씀이다. 그런데 그 스님들의 이런 말들만 뒤쫓는다면 은혜를 저버리는 짓이 될 터이고 그렇다고 그 스님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금강정안(金剛正眼)을 갖추지 못하고서는 바로 귀결점을 알 수 없으리라. 
    이 선문(禪門)에서는 홀연히 벗어나 깨쳐야지, 애초부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주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캄캄한 맹인처럼 아무것도 몰라도 일단 이근(利根)의 종성(種性)으로 맹팔랑(孟八郞)이어도 하루아침에 단박에 깨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바로 알아차려, 쓰고 싶으면 쓰고 가고 싶으면 갈 뿐, 허다한 일들이 없다. 마음씀[心行]이 익어져 모든 것을 단박에 놓아 버리면 어디에서든지 문득 쉬어서 안락해지고 종일토록 배부르게 밥 먹고 코를 골며 잠을 자도 바름을 그르치지 않는다. 
    처리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이다. 그림자를 인정하여 우러러보거나 소리를 듣되 그것을 따르지 않고, 맑고 고요한 성품을 꼭 붙들어 큰 보배를 얻은 양 가슴에 품고는 종일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고 하며, 잡된 알음알이로 스스로 자부하고 나도 한 소식 했다고 하는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더 나아가서는 종사에게 인가를 받았다고 하여 아견만을 늘리고, 고금의 문장을 이리저리 천착하여 불조의 말씀을 확인해 보고는 일체를 업신여긴다. 묻기만 하면 재주를 부리며 그것에 착 달라붙어 한 무더기가 되었는데도 정반성(定槃星)을 잘못 읽었다는 것도 끝내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에게 방편을 베풀어 끈끈한 것을 떼어 주고 결박을 풀어 주면 도리어 “나를 가만두지 않고 옥죄는구나. 도대체 무슨 심보냐!”라고 하니, 이래 가지고야 어찌 구제될 수 있으랴! 
    오로지 단박에 그릇된 줄을 스스로 알아서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놓아 버려야 하리라. 선지식이 되어 이와 같은 무리들을 만나면 큰 솜씨로 단련시키되, 한 개나 반 개만이라도 깨치게 했다면 삿됨을 뒤집어 올바름을 이루었다 하리라. 이런 사람이야말로 도량을 헤아릴 수 없는 큰 인물이라 하겠으니, 병을 많이 앓아 보아야 약의 성질을 잘 알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 기틀[心機]이 모두 끊어져 비추는 체[照體]도 이미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알음알이도 전혀 없고 그저 무심한 경지만 지킬 뿐이어서 하늘 사람이 그에게 꽃을 바치려 해도 길이 없고 마군 외도가 가만히 엿보려 해도 보지 못한다.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가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으로 헤아리고 하는 일이 모두 평상심(平常心)이어서 한가한 시골에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당장에 모든 생각을 놓아 버리고 본성을 길러서 이런 경지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털끝만큼이라도 무언가 있기만 하면 태산이 사람을 가로막는 것처럼 여겨서 바로 털어 버린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순일한 이치이긴 하나 취할 만한 것이 없으니, 취했다 하면 바로 ‘견해의 가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는 무심히 사람에게 합하고, 사람은 무심히 도에 합한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나는 체득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살펴보건대, 본분종사들은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으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스님을 ‘배울 것이 끊겨 함이 없어 옛사람과 짝할 만한 참 도인’이라 부르게 된다. 
    덕산스님이 하루는 공양이 늦어지자 발우를 들고 방장실에서 내려오는데 설봉(雪峰, 822~908)스님이 말하였다. 
    “종도 울리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덕산스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 그냥 되돌아가 버렸다. 암두(巖頭, 828~887)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가엾은 덕산스님이 말후구(末後句)도 모르는군.” 
    그러자 덕산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나를 긍정하지 않는가?” 
    암두스님이 이윽고 은밀히 그 뜻을 사뢰니 이튿날 덕산스님이 법좌에 올랐을 때는 평상시와는 전혀 달랐다. 암두스님은 손뼉을 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기쁘도다. 덕산 늙은이가 말후구를 알아 버렸네. 그렇기는 해도 앞으로 3년밖에 살 수 없도다.” 
    이 공안(公案)을 총림에서 알음알이로 아는 경우는 매우 많지만 정확하게 뚫은 자는 드물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이 구절[此句]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비와 아들이 서로 부르고 화답하지만 실로 이 구절[此句]은 없다.”고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이 구절[此句]은 비밀스럽게 전수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두는 말로만 이해한 것이어서 으로 기로(機路)만 늘릴 뿐이니 본분도리와는 거리가 대단히 멀다 하겠다. 이 때문에 “으뜸 가는 제호(醍)의 맛은 세상에서는 진미이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본분종사는 활구(活句)를 참구했지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않았다. 활구에서 깨달으면 영겁토록 잊어버리지 않겠지만 사구에서 깨치면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하리라. 불조의 스승이 되고자 하거든 활구만을 분명히 취해야 한다. 소양(韶陽, 운문)스님은 한마디 꺼냈다 하면 마치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것과도 같았다. 또 임제스님도 “취모검(吹毛劍)을 쓰고 나서 얼른 갈아 두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5음(五陰, 5온) 18계 가운데의 일이랴. 세간의 지혜와 총명함으로는 전혀 미칠 수가 없다. 
    밑바닥까지 깊이 사무쳐서 이제껏 남에 의지해 일으켰던, 밝고 어둡고 맞고 거슬리고 하는 알음알이를 모두 떨어버려, 금강정인(金剛正印)으로 도장을 찍고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을 휘둘러 본분의 수단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데는 반드시 살인도(殺人刀)라야 하며 사람을 살리는 데는 꼭 활인검(活人劒)이라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야 하며,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한쪽만 한다면 치우치게 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손을 쓰려면 반드시 방편을 살펴보아 칼끝을 상하게 하거나 손을 다치지 않게 해야만 한다. 
    어디에나 몸을 벗어날 길이 있어서, 8면으로 영롱하여 저들을 비추어 보고서 비로소 칼날을 대야 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치밀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느슨했다간 일곱 번째 여덟 번째에 떨어지리라. 그저 자신이 무심하다는 그것도 털끝만큼이라도 남겨 두지 말아야 하며, 설사 조금 있다 해도 잘라서 세 동강을 만들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더구나 예로부터 이 종문에 내려오는 본분수단은, 이 문중의 납자를 만나서 드러내 보였을 때 기연에 투합하면 함께 쓰고 기연에 투합하지 못하면 이로써 요점을 삼을 것이니, 그리하면 깨닫지 못할 일이 없다. 힘써 실천할 것을 간절히 바라노라. 

    화장 명 수좌는 금관(錦官), 협산(夾山), 종부(鐘阜)로부터 나를 따라 행각한 지 10여 년이더니, 그 정리(情理)의 뛰어난 이해력을 이미 모두 드러내 보였도다. 이 문중에 들어와서는 조용(照用)과 기지(機智)와 견해의 길을 모조리 물리쳐 버리지 않음이 없는데, 오로지 향상일로의 도리 하나만은 조실에서 백천 번 단련하였다. 요즈음 민(民) 노덕을 보살피느라 아침저녁으로 떨어져 나가 있으므로 붓으로 몇 마디를 얻어듣고자 한다기에 여기 몇 장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함께 부치노라. 


     
     
    1 화장(華藏) 명(明)으로 보이는 인물은 우선 화장사(華藏寺) 명극혜조(明極慧祚)를 떠올릴 수 있으나 ‘명극’이라는 법호를 ‘명’이라고 줄여 부른다고 생각하기 어렵고 명극혜조가 조동종 정자사(淨慈寺) 혜휘(惠暉, 1097~1183)의 법을 이었다는 점에서 『심요』가 설명하는 행적과 맞는다고 보기 어렵다. 또 ‘화장 명 수좌’를 정자사(淨慈寺) 초명(楚明)이라고 한 경우도 있는데 초명 역시 운문종의 법운선본(法雲善本, 1035~1109)의 법을 이었다는 점에서 원오극근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심요』에서 설명하는 행적을 고려하면 ‘화장 명 수좌’는 경산보인(徑山寶印, 1109~1190)으로 보인다. 경산보인은 원오극근의 제자인 화장안민(華藏安民)의 법을 이었는데 『심요』에서 “명 수좌가 민 노장을 모시고 있다.”고 한 민 노장이 바로 화장안민이다. 특히 경산보인은 원오극근처럼 사천성(四川省) 출신인데다가 원오가 사천성의 소각사(昭覺寺)에 있을 때 처음 만난 후에 곳곳에 머물렀다. 또한 『화엄』과 『기신』 등 경론에 능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강녕구(江寧區). 
    3 『논어』 「술이(述而)」 “不憤不(불분불계) 不不發(불비불발) 一隅不以三隅反(거일우불이삼우반) 則不復也(즉불부야)”(알고 싶어 분발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표현을 못해 더듬거리거나 답답해하지 않으면 말을 거들어주지 않는다. 또한 한 모서리를 가르쳐주어 나머지 세 모서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더는 가르치지 않는다.) 
    4 수주양수(壽州良遂) : 당대(唐代) 스님. 마곡보철(麻谷寶徹) 스님의 법을 이었다. 
    5 마곡보철(麻谷寶徹) : 당대(唐代) 스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의 법을 이었다. 
    6 이상의 양수스님 이야기는 『오등회원(五燈會元)』 권4 「수주양수선사(壽州良遂禪師)」(X80-99b). 
    7 낙초(落草) : 입초(入草)라고도 한다. 원래는 풀숲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양민이 난세를 피해 초야에 묻혀 초적(草賊)이 된다는 의미이다. 비유로 쓴 ‘초(草)’는 세속의 세계를 뜻한다. 
    8 혜가(慧可, 487~593)스님은 달마스님을 처음 만나 눈 속에서 팔을 잘라 구법의 의지를 드러내었으며 달마스님에게 “골수를 얻었다.”는 평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인가받아 선종 제2조가 되었다. 
    9 수주대토(守株待兎) : 『한비자(韓非子)』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토끼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고 농부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한비자(韓非子)는 요순(堯舜)을 이상으로 하는 왕도(王道)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비유를 들었다. 낡은 관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이나 사람에게 이 비유를 적용한다. 
    10 각주구검(刻舟求劍) :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자신의 칼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던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다 실수로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한 후 배가 나루터에 닿자마자 칼을 찾으려고 표시를 한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 고집하며 이를 고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유한다. 
    11 유하혜(柳下惠, 기원전 720~621) : 유하(柳下)는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땅 이름이고 혜(惠)는 시호이다.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현인이다. 성은 전(展)이고 이름은 획(獲), 자는 계(季)?금(禽)이다. 유하혜의 성정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맹자』 「공손추(公孫丑) 상」에 유하혜를 백이(伯夷)와 비교하여 평가하는 내용이 있다. 백이는 “자기의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며 자기의 벗이 아니면 벗하지 아니하며 악인들의 조정에는 서지 아니하며, 악인들과 함께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 이런 까닭에 제후들이 비록 그가 인사말을 훌륭하게 해 가지고 오더라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또한 나아가는 것을 깨끗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니라.”고 하였고, 유하혜는 “더러운 임금이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며 사소한 관직이라도 낮게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천거함에는 덕행이 있는 사람을 숨기지 아니하여 반드시 그 도로써 하였고 자기를 내버려도 원망하지 아니하며 곤궁하여도 근심하지 아니하였다. … 그러므로 스스로 만족스러운 모양으로 그 사람들과 함께 하여 자기를 잃어버리지 아니하여 남이 끌어당겨서 만류하면 멎으니 끌어당겨서 만류하는 대로 멈추는 것은 이것 또한 무조건 떠나가는 것을 깨끗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니라.”고 하고는 “백이는 너무 좁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한 편이니 좁고 공손하지 못한 것은 군자가 둘 다 따르지 않은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12 “善學柳下惠(선학유하혜) 終不師其迹(종불사기적)” : 왕숙(王肅, 195~256)이 편찬한 것으로 일려진 『공자가어(孔子家語)』 「호생(好生)」 제10에 유하혜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노(魯)나라 사람이 홀로 살았고 이웃의 과부도 홀로 살았다. 밤에 몰아치는 폭풍 때문에 과부의 집이 무너져 달려가 부탁했으나, 노나라 사람은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다. 과부가 창가에서 ‘어찌 인자하지 못하게 나를 들이지 않소?’라고 하자 ‘남자와 여자는 60살이 되지 않으면 같이 거처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지금 우리는 아직 젊으니 그대를 들일 수 없소’라고 했다. 여인이 ‘그대는 어찌 유하혜처럼 하지 않소? 오갈 데 없는 여자를 거둬 보살폈지만 나라에서 그를 문란하다 하지는 않았소’라고 하자 ‘유하혜라면 할 수 있으나, 나는 진실로 할 수 없소. 내가 장차 나의 할 수 없음으로 유하혜의 할 수 있음을 배우겠소’라고 했다. 공자께서 이를 듣고서 ‘훌륭하도다. 유하혜를 배우고자 하는 자 중에 아직 이와 유사한 자가 없었다. 지극히 좋은 점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 행위는 답습하니 않으니, 지혜롭다 할 만하도다’라고 하셨다.” 
    이 이야기는 ‘좌회불란(坐懷不亂)’으로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인데, 마지막의 공자의 평가를 따와 다양한 선종 문헌에서 선사들이 화두처럼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3 골률추(骨律錐) : 날카로움이 사라진 송곳. 예리함을 감춘 송곳에 수행자의 원숙함을 비유한 말. 
    14 천황(天皇, 748~807) : 당나라 천황도오(天皇道悟). 속성은 장(張) 씨, 절강성 무주 금화현(金華縣) 출신. 14세에 출가하여 2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경산도흠(徑山道欽, 715~793)에게 참학하고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대매산(大梅山)으로 들어갔다가, 건중(建中, 780~783) 초기에 강서성 종릉(鍾陵)에 이르러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에게 참학한 후 석두희천(石頭希遷, 701~791)을 친견하고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형주성(荊州城) 동쪽 천황사(天皇寺)로 옮겨 머물렀다. 제자에 용담숭신(龍潭崇信, 753~823)이 있다. 
    15 덕산(德山, 782~865) : 당나라 덕산선감(德山宣鑑). 속성은 주(周) 씨, 검남(劍南, 사천) 출신. 20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경과 율을 공부하였다. 『금강경』에 정통하여 주금강(周金剛)이라고도 하였다. 용담숭신(龍潭崇信, 753~823)을 만나 30여 년 동안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덕산(德山)에 머물면서 분방하고 호쾌한 선풍을 널리 선양하였다. 당시의 두 가지 대표적 선풍을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는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제자에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암두전활(巖頭全, 828~887) 등이 있다. 
    16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5(T51-318a). 
    17 석두(石頭, 701~791) : 석두희천(石頭希遷). 속성은 진(陳) 씨, 광동성 단주(端州) 출신. 조계에 가서 6조 혜능(慧能)에게 출가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혜능이 입적하자 청원행사(靑原行思, 671~741)에게 참학하였다. 천보(天寶) 연간(742~756) 초기에 형산(衡山)의 남사(南寺)에 가서 그 절 동쪽의 석상(石上)에 암자를 짓고 항상 좌선하였으므로 석두(石頭)화상이라고 불렸다. 광덕(廣德) 2년(764) 문인들의 청에 응하여 종풍을 선양하다가 약산유엄(藥山惟儼, 746~829)에게 법을 부촉하였다. 시호는 무제(無際)대사. 저서에 『참동계(參同契)』 1권, 『초암가(草庵歌)』 1권이 있다. 
    18 『경덕전등록』 권14(T51-309c). 
    19 운문(雲門, 864~949) : 운문종의 운문문언(雲門文偃). 속성은 장(張) 씨, 절강성 가흥(嘉興) 출신. 어려서부터 출가에 뜻을 두어 17세에 출가,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사분율(四分律)』 등을 배웠다. 그 후 황벽희운(黃檗希運, 751~850)의 법을 이은 목주도명(睦州道明, 780~877)에게 참구하고, 다시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에게 참구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설봉을 떠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교류하다가, 건화(乾化) 원년(911)에 광동성 조계(曹溪)로 가서 6조의 탑에 예배하고, 복주대안(福州大安, 793~883)의 법을 이은 영수여민(靈樹如敏, 862~912) 회하로 들어갔다가 영수의 입적 후 그 법석을 이어 운문산(雲門山)에 30여 년을 머물렀다. 어록집으로 수견(守堅)이 엮은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 3권이 있다. 
    20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 권1(T47-548b). 
    21 조주(趙州, 778~897) : 조주종심(趙州從). 속성은 학() 씨, 산동성 조주(曹州) 학향(鄕) 출신.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에게 참학하여 깨달음을 얻고 남전에게 귀의하였다. 여러 곳을 유력하다가 나이 80이 되어서야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면서 40년 동안 선풍을 드날렸다. 시호는 진제(眞際)대사. 어록인 『조주록(趙州錄)』이 널리 읽힌다. 
    22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권13(X68-77c). 
    23 청평(淸平, 832~906) : 청평영준(淸平令遵). 속성은 왕(王) 씨, 악주(鄂州) 동평(東平) 출신.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율학을 배웠다. 취미무학(翠微無學)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대통선원(大通禪院)을 창건하여 종풍을 널리 선양하였다. 시호는 법희(法喜)선사. 
    24 『선림유취(禪林類聚)』 권17(X67-101a). 
    25 삼각(三角) : 삼각법우(三角法遇). 위산영우(山靈祐, 771~853)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기주(州) 삼각산(三角山)에서 법문하였다. 
    26 맹팔랑(孟八郞) : 맹(孟)씨 네 여덟 째 아들이라는 말이다. 도리나 관습에서 벗어난 일을 억지로 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27 정반성(定槃星) : 저울의 기준이 되는 눈금. 
    28 “道無心合人(도무심합인) 人無心合道(인무심합도)” : 『균주동산오본선사어록(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 권1(T47-510a). 
    29 설봉(雪峰, 822~908) : 설봉의존(雪峰義存). 속성은 증(曾) 씨, 복건성 천주(泉州) 남안(南安) 출신. 12세에 출가하였으나 24세에 회창(會昌)의 파불(破佛)을 만나, 속복을 입고 부용영훈(芙蓉靈訓, ?~851)에게 참구하였다. 그 후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의 회하에서 반두(飯頭)의 일을 맡아 보았지만 특별한 계기를 맺지는 못했다. 동산의 가르침에 따라 덕산선감(德山宣鑑)에게 참구하였다. 어느 날 암두전활(巖頭全, 828~887)과 흠산문수(欽山文邃)와 함께 행각하다가 호남성 오산(鰲山)에 이르렀을 때,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지관좌선(只管坐禪)을 하다가 암두에게 한마디를 듣고 깨달아 덕산의 법을 이었다. 중화(中和) 2년(882)에 당 희종(禧宗) 황제로부터 진각(眞覺)대사라는 호와 자색 가사를 받았다. 문하에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 보복종전(保福從展, ?~928) 등 많은 선승이 있고,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독특한 종풍을 드날렸다. 『설봉진각대사어록(雪峰眞覺大師語錄)』 2권이 있다. 
    30 암두(巖頭, 828~887) : 암두전활(巖頭全). 속성은 가(痂) 씨, 천주(泉州) 출신.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과 흠산문수(欽山文邃)와 도반이 되어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에게 참학하고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의 법을 이었다. 시호는 청엄(淸儼)대사. 
    31 『무문관(無門關)』 권1(T48-294b) 등에서 ‘덕산탁발(德山托鉢)’로 널리 알려진 공안이다. 특히 성철스님 『본지풍광』의 제1칙으로 등장한다. 
    32 『천동각화상송고(天童覺和頌古)』 권2(X67-454c). 
    33 현재의 광동성(廣東省) 소관시(韶關市).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 스님의 광태선원(光泰禪院)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운문스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34 『경덕전등록』 등에 따르면 임제스님이 입적할 때에 남긴 전법게의 일부이다. 전체 게송은 다음과 같다. “흐름 따라 머무르지 않는 도리를 묻는다면 참다운 관조는 끝없는 것이라 말해 주리라. 모습과 이름을 떠난 것 본래 성품 없으니 예리한 칼날을 쓰고서 얼른 갈아 두어라.”(沿流不止問如何[연류부지문여하] 眞照無邊說似他[진조무변설사타] 離相離名如不[이상이명여불품] 吹毛用了急須磨[취모용료급수마], 『경덕전등록』 권12, T51-291a). 
    35 이 편지는 『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 권14(T47-777b~778b)에도 전한다. 
    36 원오극근의 법을 이은 화장안민(華藏安民, 1086~1136)을 가리킨다. 호는 밀인(密印), 속성은 주(朱) 씨, 사천성 가정부(嘉定府) 출신. 처음에는 교학을 배웠으며 성도(成都)에서 『능엄경(楞嚴經)』을 강의하였다. 원오극근에게 참학하여 인가를 받고 법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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